블레스티지·헬리오시티...뜻 모를 ‘외계어’ 넘치는 요즘 아파트 작명법 들여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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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 '이름짓기 경쟁' 도 넘으면서 외래어로 한글 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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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하나. ‘헬리오시티’가 무엇일까.

정답을 알고 있다면 아파트 재건축 시장에 깨나 관심 있는 사람이다. 헬리오시티는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이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 맞은 편 가락시영아파트를 재건축해 짓는 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여러모로 화제를 불러왔다. 첫째, 규모다. 9510가구로 국내 최대 규모 재건축 단지다. 둘째, 비리다. 지난해 재건축 조합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데 이어 조합장 직무대행도 같은 혐의로 구속됐다.
   
마지막으로 ‘헬리오시티’란 이름이다. 빛을 뜻하는 헬리오(helio)와 도시(city)를 합성한 ‘빛의 도시’란 뜻이다. 그런데 2015년 분양 당시부터 일부 조합원들이 “약칭이 ‘헬 시티’라 지옥(hell)이 떠오른다”며 반발해왔다. 결국 조합은 다음달 중 총회를 열어 새 이름을 선정할 계획이다.

그런데 새 후보도 언뜻 봐선 뜻 모를 이름이다. ①헬리오시티 ②오비체시티 ③벨라우즈 ④아젠시아.  조합 관계자는 “2018년 12월 입주 때까지 단지 이름이 얼마든 바뀔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남 재건축 시장을 중심으로 새 아파트가 잇따라 분양하면서 '정체불명' 아파트 단지 이름도 속출하고 있다. 입지 특성을 반영하고 다른 아파트보다 월등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친 외래어·합성어를 가져다 쓰면서다. 건설사 간 아파트 작명(作名) 경쟁이 한글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업비만 10조에 달하는 재건축 사업으로 주목받은 서초구 반포주공 1단지의 경우 현대건설이 수주해 ‘디에이치 클래스트(THE H Class+est)’로 짓는다. ‘디에이치’는 현대건설의 프리미엄 브랜드다. 클래스트는 명사 ‘클래스(class)에 최상급 접미사 ‘-est’를 붙여 만들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최대·최고의, 유일한 아파트 단지를 짓겠다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est’는 형용사 뒤에 붙여야 해 어법에 어긋난다. 1단지 한 조합원은 “분양가가 3.3㎡당 5000만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고급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콩글리시’ 이름이라 불편하다”고 말했다. 
  
서대문구 가재울 5구역을 재개발해 지난달 분양한 삼성물산 ‘래미안 DMC 루센티아’도 시공사 설명을 듣기 전까지 이름 뜻을 짐작하기 어렵다. 은은하게 빛난다는 뜻의 ‘루센트(Lucent)’와 중심을 뜻하는 ‘센터(Center)’, 휘장·배지란 뜻의 ‘인시그니아(insignia)’를 붙여 지었다.

현대건설·대림산업 컨소시엄이 강동구 고덕주공3단지를 재건축해 짓는 ‘고덕 아르테온’도 마찬가지다. 예술이란 뜻의 ‘아트(Art)’와 신을 상징하는 ‘테온(Theon)’의 조합이다. 두 곳 모두 좋은 뜻을 입혔지만 각각 입지를 떠올리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주거환경·조경·편의시설 개선해 브랜드 차별화해야"


강남구 개포주공 2단지를 재건축한 삼성물산 ‘래미안 블레스티지’는 블레스(bless·축복)에 프레스티지(prestige·명예)를 더한 말이다. 그런데 조합원 사이에서 이름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름을 짓기 전 후보로 올랐던 경쟁작도 ‘럭스티지(럭셔리+프레스티지)’, ‘트리스티지(트리니티+프레스티지)’, ‘포레스티지(포레스트+프레스티지)’ 같은 합성어였다. 이 아파트 한 조합원은 “좋은 뜻의 영어 단어를 갖다 붙이면 고급스럽다는 발상이 촌스럽다”고 지적했다.
1970년대 처음 선보인 서울 중산층 아파트엔 일본풍 ‘맨션’(대저택)을 이름으로 붙인 경우가 많았다.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이 대표적이다. 1976년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 사용을 금지한 이후로 동네에 건설사 이름을 붙이는 형태가 주를 이뤘다. 여의도 한양아파트,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대표적이다. 그리곤 외환위기 이후로 삼성물산 ‘래미안’,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대우건설 ‘푸르지오’, 롯데건설 ‘롯데캐슬’ 같은 브랜드 고유 작명이 이어져왔다.

좋은 뜻의 외래어를 덧입히는 게 유행처럼 번진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여러 건설사가 컨소시엄 형식으로 시공하는 경우가 늘면서 특정 회사 브랜드명을 내세우기 힘들어 따로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송파구 잠실주공 1~3단지를 재건축한 엘스(1단지), 리센츠(2단지), 트리지움(3단지) 아파트 ‘3총사’가 대표적이다.

엘스(LLL’s)는 생활을 즐기는 ‘Living’, 문화를 사랑하는 ‘Loving’, 시대를 이끄는 ‘Leading’의 앞글자 L을 합쳐 만들었다. 리센츠(Ricenz)는 강(River)+중심(Center)+최고(Zenith)의 영문 앞글자에서 따온 식이다. 엘스 한 입주민은 “단지에 7년째 살면서도 이런 뜻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건설사가 정체불명 작명에 고심하는 건 “무조건 외래어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생겨 집값을 올리는 데 도움된다”고 주장하는 분양 계약자들이 많아서다.

건설사 이름만 달린 오래된 아파트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요즘 짓는 아파트 브랜드명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마포구 신공덕 삼성아파트 주민들은 래미안으로 이름을 바꿔주지 않는다며 마포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내 결국 이름을 바꿨다. 

문제는 여러 외래어를 조합한 이름이 취지와 달리 본래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데다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반대로 순우리말 아파트 브랜드를 쓰는 건설사도 있다. 부영이 대표적이다. 부영은 1983년부터 ‘사랑으로’란 브랜드를 사용해왔다. 이 밖에도 한화건설 ‘꿈에그린’, 금호건설 ‘어울림’이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개나리’ ‘진주’ 같이 부르기 편한 한글 이름을 쓰는 아파트를 찾기 어려워졌다. 최근 짓는 아파트는 영어란 껍데기만 빼면 청소년이 사용하는 ‘외계어’와 다를바 없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건설사가 상품 경쟁력을 키우기보다 돈 안드는 브랜드 작명 경쟁에만 몰두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함영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브랜드가 분양가를 높이기 위한 포장 수단이 돼선 안 된다. 주거환경이나 조경·편의시설 등 설계를 개선하는 데서부터 브랜드를 차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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